“농민의 피땀이 대기업 마진으로 흐르는 빨대 구조”⸱⸱⸱수조 원대 유통 보조금이 낳은 부작용
리스크 회피형 경영, 마케팅 역량 부재⸱⸱⸱"가격 결정권 포기" 비판
[예결신문=신세린 기자] 대한민국 농산물 산지 물량의 60% 이상을 틀어쥔 농협의 위상은 그야말로 무소불위다. 하지만 현지에서 거둔 농산물은 대형 마트와 온라인 쇼핑몰 등에 풀리며 거대 자본의 한 수익원에 불과해진다. 농협의 위상은 딱 거기까지다.
유통 시장에서 농협의 직접 판매 점유율은 수십 년째 13~15% 수준에 갇혀 있다. 60%의 물량을 확보하고도 가격 결정권을 대형 유통 자본에 헌납해온 이 기형적인 유통 구조는 농민을 빈곤하게 만들고 대기업의 배만 불려왔다. 본지는 농협 유통의 해묵은 논란과 그 이면에 숨겨진 '빨대 행정'의 실체를 데이터와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심층 분석했다.
■ 산지의 포식자, 시장의 패배자…'수집 대행업'에 안주한 농협
29일 예결신문이 농림축산식품부와 농협 경제지주의 작년 유통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농협의 품목별 산지 수집률은 과일류 52.4%, 채소류 48.9% 등 전체 평균 50% 이상, 마늘, 양파 등 일부 전략 품목은 70%에 육박했다.
농민들에게 지역 농협은 유일한 판로이자 보조금 집행 창구다. 하지만 농협의 역할은 '수집' 단계에 불과했다. 스스로 소비자에게 직접 팔 역량이 부족해 물량의 70% 이상을 이마트, 롯데마트, 쿠팡 등 대형 유통업체나 가락동 도매시장의 거대 중도매인들에게 넘긴다.
이는 농민을 대신해 농산물 값을 제대로 받아줘야 할 농협이 실제로는 대기업 유통망에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물량을 공급해주는 '하청 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유통의 부가가치는 가공, 브랜드 마케팅, 소비자 데이터 분석에서 발생하는데, 농협은 이 핵심 과정을 민간 자본에 통째로 넘겨주고 자신들은 취급 물량에 따른 소액의 위탁 수수료와 지자체 유통 보조금에 안주하고 있다.
농업 정책 분야의 권위자인 서울대학교 농경제사회학부 임정빈 교수는 농협의 이러한 구조적 모순이 한국 농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고 진단했다.
임 교수는 "농협이 그동안 수익성이 높은 신용사업(은행)에 치중하면서 농산물을 잘 팔아줘야 하는 경제사업 본연의 역할이 위축되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농협이 산지 유통 물량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지 유통 단계에서 대형 마트와 온라인 플랫폼에 주도권을 내준 것은 뼈아픈 실책"이라며 "재고 부담과 판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대기업에 물량을 넘기는 방식은 농민의 수취 가격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분석했다.
■ "신선도 리스크와 인프라 격차"⸱⸱⸱직접 판매는 도박?
이러한 비판에 대해 농협 측은 현실적인 한계를 호소하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농협중앙회 측은 "대형 마트나 온라인 플랫폼은 전국 단위의 콜드체인(저온 물류) 인프라와 빅데이터 마케팅 팀을 수십 년간 수조 원을 들여 구축해온 곳들"이라며 "반면 단위농협은 지역별로 분절돼 물량을 통합해 대응하기에 조직적, 자금적 한계가 명확하다"고 해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지방의 한 지역농협 조합장 또한 "농산물은 공산품과 달리 하루만 지나도 상품 가치가 급락하는 신선도가 생명인데, 농협이 직접 판매를 대폭 확대했다가 재고 처리에 실패하면 그 적자는 고스란히 조합원인 농민의 손실로 돌아간다"며 "대형 유통사에 물량을 넘기는 것은 리스크를 분산하고 최소한의 판로를 보장받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지 무능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즉, 유통 역량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직접 판매 확대는 오히려 농가 경제를 파탄 낼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농업 경제학의 석학인 이정환 GS&J 인스티튜트 이사장은 농협의 이러한 반론이 본질을 회피하는 '무능의 변명'이라고 지적했다. 이 이사장은 "신선도 리스크나 인프라 부족은 수십 년간 농협이 은행업 수익에만 안주하며 경제사업 투자를 소홀히 한 결과이지 구조적인 불가항력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그는 "60%의 물량을 쥔 농협이 '재고가 무서워 못 판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며 "농민의 주머니가 두꺼워지려면 대기업 유통사와 대등한 파트너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산지 물량을 기반으로 한 가격 결정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또한 "지자체가 농협에 지원하는 스마트 APC(산지유통센터) 예산이 단순한 건물 짓기를 넘어 디지털 유통 역량 강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농협은 영원히 대기업의 빨대 역할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 수조 원 보조금, 결국 대기업 손에
지자체의 농업 세출 내역을 분석해보면, 매년 전국 각 지자체는 '농산물 마케팅 지원', '브랜드 육성', '물류비 지원' 등 명목으로 지역 농협에 수조 원 규모의 보조금을 교부한다. 하지만 세금이 투입된 물류 시스템을 거친 농산물이 결국 대기업 유통사로 흘러가 그들의 마진율만 높여주고 있다면 이는 농민이 아닌 유통 자본을 위한 세금 집행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본지는 이어지는 2부에서 이러한 무능한 유통 구조를 고착화하는 '제왕적 조합장'들의 장기 집권과 꼼수 연임 실태를 집중 조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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