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결신문=백도현 기자] 지난 3월 ‘토지거래허가구역(토허제) 해제→과열’ 사태에 “송구하다”고 고개 숙였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또다시 부동산 시장에 불을 지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핵심은 ‘신속통합기획 2.0(신통 2.0)’, 그중에서도 한강벨트 중심 대규모 정비사업 가속화다.
문제는 공급 속도전을 명분으로 시장 기대를 다시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한강 일대 가격은 들썩이고 중앙정부의 공공 공급 기조와도 정면충돌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공급 속도전이 단기 기대심리를 자극해 가격 불안을 되살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 토허제 ‘오락가락’이 남긴 상흔
올해 2~3월, 서울시는 강남·서초 등 일부 지역의 토지거래허가구역을 해제했다. 서울시는 거래 활성화를 이유로 들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해제 직후 강남3구 거래량이 전월 대비 42% 급증했고, 한국부동산원은 아파트 실거래가가 3주 연속 상승 전환했다고 밝혔다. 단기 과열 조짐이 뚜렷해지자 시는 한 달 만에 다시 토허제를 확대 재지정하며 정책을 뒤집었다.
오 시장은 지난 3월 27일 시청 브리핑에서 “시장 변동성이 커졌다. 송구하다”고 공개 사과했다. 그러나 거래량과 가격이 동시에 튀면서 “정책이 즉흥적이다”는 비판이 이어졌고, 정책 신뢰성에 흠집이 났다. 정책 신뢰가 한 번 흔들리면 시장은 더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이 확인된 사건이었다.
김상훈 서울시립대 도시행정학과 교수는 “정책이 한 번 흔들리면 시장은 다음 조치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번 신통 2.0 발표도 같은 맥락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 ‘19.8만호 공급’의 실체⸱⸱⸱순증은 미미
시는 지난달 29일 ‘신속통합기획 2.0’을 발표하며 오는 2031년까지 31만 가구를 착공하고, 그중 19만8000가구(64%)를 한강벨트에 집중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수치는 멸실 가구를 포함한 총공급 물량이다. 정비사업은 기존 가옥 철거 후 조합원 재분양이 우선이기 때문에 실제 순증 가구 수는 이보다 훨씬 적다.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서울 정비사업의 일반분양 비중은 평균 38.7%에 불과하다.
예컨대 송파구 잠실주공5단지의 경우 기존 3930가구를 철거해 약 6400가구로 재건축할 계획이지만, 일반분양은 1200가구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표면적으로는 ‘공급 확대’처럼 보이지만, 서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 공급은 제한적인 셈이다.
■ 고가 재건축 중심…“부자들만 배불리는 공급”
한강벨트 정비사업은 대부분 강남·서초·송파 등 고가 주거지의 재건축이다. 부동산R114에 따ㅡ면 지난 9월 기준 대표 단지의 예상 분양가는 전용 84㎡ 기준 25억~30억 원대에 달한다. 반포 ‘래미안 원베일리’(2024년 준공)는 분양가가 34억원을 넘어섰고, 잠실·압구정도 분양가 상한제 적용 제외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시의 발표는 ‘19.8만호 공급’이라는 인상적인 숫자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고가 신축 아파트가 늘어나는 구조다. 한강변 고급 재건축 단지 중심의 공급은 실수요층보다는 자산가들의 교체수요를 자극해 시장 기대심리를 끌어올릴 수 있다.
특히 이번 발표가 서울시청(강북)에서 진행된 점도 상징적이다. 강북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강북에서 강남 재건축 정책을 발표한 셈”이라며 “서민을 조롱하나”는 냉소가 퍼지고 있다.
■ 중앙정부와 정면충돌…공공 vs 민간, 중저가 vs 상급지
이재명 정부는 9·7 주택공급 대책을 통해 오는 2030년까지 135만 호 공급을 목표로 공공택지·공공분양·임대 중심의 순증 전략을 제시했다. LH를 중심으로 수도권 외곽의 공공택지를 활용하고 중저가·임대주택을 확대해 주거 안정과 가격 통제를 병행하겠다는 구상이다.
반면 서울시는 민간 재건축 중심으로 정비사업 절차를 단축하고 용적률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등 민간 속도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공공이 가격 하방 신호를 보내려는 국면에서 서울시가 한강벨트 재건축 공급계획을 발표한 것은 정책 신호의 충돌로 해석된다.
서울연구원 도시계획센터 관계자는 “공공과 민간의 공급 방식이 정면으로 부딪히면 시장은 혼란스러워지고 정책 신뢰도도 떨어질 수 있다”며 “서울시가 순증 규모와 가격대별 공급계획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3월 토허제 해제 사태에서 확인됐듯, 서울 부동산 시장은 정책 신호에 매우 민감하다. 당시 오 시장은 단기 과열을 불러오고 사과까지 했다. 그런데 반년 만에 총공급 부풀리기와 고가 재건축 중심의 ‘속도전’ 정책을 다시 내놓았다.
공급은 중요하지만 ▲총공급과 순증의 명확한 구분 ▲지역·가격대별 균형 ▲중앙정부와의 정책 정합성 확보가 병행되지 않으면 공급 확대는 곧 가격 상승 자극으로 변질될 수 있다. 오 시장의 이번 발표는 불을 끄기는커녕 이재명 정부를 향해 다시 불쏘시개를 던진 셈이라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3월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시장 자극적 발표보다는 데이터 기반의 단계별 실행계획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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