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결신문=백도현 기자] 미국 정부의 반도체 지원법(이하 칩스법)에 따른 보조금 지급 절차가 막바지에 이른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의 최종 계약 체결이 지연되면서 국내 반도체 업계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미국 주요 기업들이 잇따라 보조금 수령을 확정 짓는 동안 한국 기업들만 협상 테이블에 남아 있는 형국이다. 도널드 트럼프 차기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 정치적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공정 수율 등 기술적 난제까지 겹치며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 마이크론 등 美 기업은 '속전속결'…삼성·SK만 남았다
13일 반도체 업계와 주요 외신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지난 10일 자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대한 61억6500만 달러(한화 약 9조원) 규모의 보조금 지급을 최종 확정했다. 이는 당초 예비 거래 각서(PMT)에서 논의된 금액과 동일한 수준으로, 미 정부가 자국 반도체 공급망 강화를 위해 얼마나 속도를 내고 있는지를 방증한다.
이로써 마이크론은 인텔(78억6000만 달러), TSMC(66억 달러), 글로벌파운드리스(15억 달러)에 이어 네 번째로 보조금 확정 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TSMC는 외국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대규모 투자와 애플,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와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제 업계의 시선은 아직 확정 통보를 받지 못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쏠리고 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 투자 등을 조건으로 64억 달러(약 9조원),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패키징 공장 건설 등으로 4억5000만 달러(약 6300억원)의 보조금을 받기로 예비 합의한 상태다. 하지만 최종 계약 체결 소식은 해를 넘길 위기에 처해 있다.
■ 1월 20일 '데드라인'…트럼프 '칩스법 폐기론' 공포
문제는 시간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임기 종료일인 내년 1월 20일 이전에 칩스법 관련 모든 행정 절차를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과 동시에 칩스법의 존폐가 불투명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칩스법을 "나쁜 거래(Bad Deal)"라고 비판하며 보조금 지급 대신 고관세 부과를 통해 해외 기업의 미국 내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만약 바이든 임기 내에 구속력 있는 최종 계약을 체결하지 못할 경우,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보조금 규모가 대폭 축소되거나 최악의 경우 전면 백지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내 기업들이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 외신 "정치 리스크에 기술적 난항 겹쳐"…삼성 위기론 점화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의 보조금 확정이 지연되는 배경에는 정치적 변수 외에도 기술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캐나다의 유력 IT 전문 매체 WccfTech는 13일 "삼성전자가 텍사스주 테일러 팹(공장)에 17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진행 중이나, 최근 보조금 협상이 결렬 위기에 처하거나 지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그 원인으로 '기술적 준비 부족'을 지목했다. WccfTech는 "삼성이 TSMC와의 파운드리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도입한 3나노미터(nm) GAA(Gate-All-Around) 공정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GAA는 전류가 흐르는 채널의 4면을 게이트가 둘러싸는 구조로, 기존 3면을 감싸는 핀펫(FinFET) 방식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가 빠르고 전력 효율이 높은 차세대 기술이다. 삼성은 세계 최초로 3나노 공정에 GAA를 도입하며 기술 초격차를 노렸다.
하지만 매체는 "연구소 단계에서 수율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양산 공정으로 이관한 것이 화근이 된 것으로 보인다"며 "최근 2세대 3nm GAA 공정 수율이 초기 목표치였던 70%를 크게 밑도는 20%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고 전했다.
이는 곧 생산성 저하와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 수율이 낮다는 것은 웨이퍼 한 장에서 건져낼 수 있는 양품 칩의 개수가 적다는 뜻으로, 이는 고객사 확보에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 EUV 장비 반입 연기…"투자 이행 의지 입증해야"
수율 불안정은 설비 투자 속도 조절로 이어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당초 테일러 공장에 반입할 예정이었던 네덜란드 ASML사의 최첨단 EUV(극자외선) 노광 장비의 도입 시기를 연기했다.
EUV 노광 기술은 반도체 웨이퍼에 빛을 쏴 회로를 그리는 포토 공정에서 극자외선 파장을 활용해 초미세 회로를 구현하는 핵심 기술이다. 3나노 이하 선단 공정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장비지만, 공정이 안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당 수천억 원에 달하는 장비를 미리 들여놓는 것은 경영상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WccfTech는 "미국 정부 입장에서는 삼성이 테일러 공장에 약속한 투자를 끝까지 이행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며 "보조금 지급은 삼성이 구체적인 투자 지속 의지와 기술적 로드맵을 확인시켜주는 경우에만 보장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기술적 난관 극복이 보조금 수령의 선결 과제가 된 셈이다.
■ '율리시스'로 반전 노린다…2nm 승부수
물론 비관적인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는 내부적으로 '율리시스(Ulysses)'라는 코드명의 2나노 공정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3나노에서의 시행착오를 발판 삼아 2나노 공정에서는 확실한 수율 안정화와 성능 개선을 이뤄내겠다는 각오다.
업계 전문가들은 "현재의 위기는 단순한 자금 문제를 넘어 한국 반도체의 기술 경쟁력을 시험하는 무대"라며 "정치적 불확실성은 정부 차원의 외교력으로 풀고, 기업은 압도적인 기술력을 증명해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임을 각인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트럼프 2.0 시대의 파고와 기술적 난제를 넘어, 미국 정부의 보조금이라는 '실리'와 기술 리더십이라는 '명분'을 모두 챙길 수 있을지 향후 1~2개월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운명을 가를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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