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 여파·환율 불안에 트럼프 2기 리스크까지 겹친 '복합 위기'
반도체 'HBM 쏠림' 한계⸱⸱⸱자동차·철강은 마이너스 성장 예고
[예결신문=백도현 기자] "경제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수출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정부의 장밋빛 낙관론이 나온 지 불과 한 달 만에 한국 경제가 시계제로의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내란 사태라는 초유의 정치적 불확실성이 시장을 강타하며 환율이 IMF 외환위기 이후 최고치로 치솟은 가운데 한국 경제의 최후 보루였던 수출마저 내년에는 사실상 성장을 멈출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제기되면서다. 대내적으로는 정치·금융 불안, 대외적으로는 트럼프 2기의 보호무역주의와 중국의 저가 공세가 겹치며 대한민국 경제가 '퍼펙트 스톰(초대형 복합 위기)'에 직면했다는 분석이다.
■ 8.3%에서 1%대로 추락…차갑게 식어버린 수출 엔진
23일 재계와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에 따르면 내년도 한국 수출 산업은 그야말로 빙하기를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한경협이 시장조사 전문기관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매출액 상위 1000대 기업 중 12대 수출 주력 업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년 수출 전망' 조사 결과, 내년 수출 증가율은 고작 1.4%에 그칠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올해 1~11월 기록한 수출 증가율 8.3%와 비교하면 6분의 1 수준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금융연구원 등 주요 국책 연구기관들 역시 내년 수출 증가율을 2%대 초반으로 낮게 잡고 있어 '수출 한국'의 위상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내란 사태 이후 외국인 자금 이탈과 환율 급등으로 기업들의 경영 환경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상황에서 실물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마저 꺾인다면 내년 한국 경제는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추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된다.
■ 반도체 착시효과 걷히니…자동차·철강 '역성장' 공포
업종별 기상도는 더욱 심각하다. 바이오·헬스(5.3%), 일반기계(2.1%), 석유화학(1.8%) 등 일부 업종은 소폭의 상승세가 예상되지만, 이는 기저효과에 기인한 것일 뿐 본격적인 회복세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국 수출을 떠받치던 주력 업종인 자동차·부품(-1.4%)과 철강(-0.3%)은 역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전기·전자(1.5%)와 선박(1.3%) 역시 사실상 제자리걸음에 가까운 성장세에 그칠 전망이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대목은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반도체의 불안정성이다.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는 견조할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제외한 범용 메모리 시장은 여전히 겨울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내년도 HBM 시장은 확대되겠지만, 전체 볼륨을 좌우하는 범용 메모리 반도체는 수요 회복이 더디고 재고 소진이 원활하지 않아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반도체 호황이라는 착시 현상 뒤에 가려진 '반도체 양극화'가 내년 수출 실적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 트럼프 2기·中 밀어내기⸱⸱⸱'G2 리스크'에 낀 샌드위치 신세
기업들은 수출 부진의 핵심 원인으로 '대외 리스크'를 꼽았다. 응답 기업들은 ▲주요 수출 대상국의 경기 부진(39.7%) ▲관세 부담 등 보호무역주의 강화(30.2%)를 가장 큰 위협 요인으로 지목했다.
특히 내년 1월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2기의 '자국 우선주의' 기조는 한국 수출에 치명타가 될 전망이다. 보편적 관세 부과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폐기 가능성 등은 자동차와 배터리, 철강 등 주력 산업의 대미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직격탄이다.
여기에 중국발(發) '밀어내기 수출' 공세는 한국 제조업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내수 부진에 시달리는 중국 기업들이 재고를 헐값에 글로벌 시장에 쏟아내면서 가격 경쟁력이 급격히 훼손되고 있어서다.
철강업계에서는 "중국산 저가 철강재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제는 원자재 가격보다 싼 중국산 완제품이 유통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며 "기술 격차는 좁혀졌는데 가격 경쟁력에서는 도저히 중국을 따라잡을 수 없어, 말 그대로 고사 위기"라고 토로한다. 이러한 환경 악화로 인해 선박(50.0%), 전기·전자(45.4%), 자동차(42.9%) 업계는 내년도 채산성이 올해보다 더욱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 "환율 안정·규제 혁파 시급"…골든타임 놓치면 공멸
경제 전문가들은 현재의 위기가 일시적인 경기 순환적 요인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위기라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내란 사태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 심화와 글로벌 통상 환경의 급변이 맞물린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국회의 초당적인 협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상호 한경협 경제산업본부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미·중 갈등이 심화하고 관세 장벽이 높아지면서 수출 기업들의 공포가 현실화되고 있다"며 "여기에 국내 정치 불안까지 겹치며 기업들의 투자 의욕이 꺾이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본부장은 "정부는 무엇보다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환율을 안정시켜 기업들의 경영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통상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 보호무역주의 파고를 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기업들은 ▲원자재 수입 관련 세제 지원 ▲안정적 공급망 확보 대책 ▲규제 입법 지양 등을 정부와 국회에 강력히 주문했다.
한국 경제가 1%대 수출 성장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장기 침체의 늪에 빠질지, 아니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체질 개선에 성공할지, 2025년은 그 운명을 가를 결정적인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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