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특집: 2025 지방 재정 실태] ② 강남·서초·마포 '예비비' 실체⸱⸱⸱비상금인가 쌈짓돈인가

백도현 기자

livekmin@hanmail.net | 2025-12-25 11:49:15

강남·서초구, 행사비·비품 구입에 예비비 '펑펑'⸱⸱⸱마포·용산구, 의회 삭감 예산 예비비로 부활 '꼼수'
재정 민주주의 훼손 심각⸱⸱⸱전문가 "예측 가능한 사업에 예비비 쓰는 것은 지방재정법 위반 소지"
'2024회계연도 결산서' 분석에 따르면 강남, 서초, 마포 등 주요 자치구에서 예비비를 사실상의 '재량 사업비'처럼 사용하며 의회의 견제 기능을 무력화시킨 실태가 확인됐다. (일러스트=AI)

[예결신문=백도현 기자] 예산은 '예측의 산물'이며 지방 재정의 모든 지출은 구민의 대의기관인 구의회의 사전 심의와 승인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지방자치의 대원칙이다. 하지만 서울시 자치구 현장에서는 이 원칙을 무력화하는 '합법적 탈출구'로 예비비가 악용되고 있다.

25일 본지가 서울 각 자치구의 '2024회계연도 결산서'를 분석한 결과 강남, 서초, 마포 등 주요 자치구에서 예비비를 사실상의 '재량 사업비'처럼 사용하며 의회의 견제 기능을 무력화시킨 실태가 확인됐다.

■ 강남·서초, '예측 가능한 사업'에 예비비 지출
서울시 자치구 중 재정 규모가 가장 큰 강남구는 2024회계연도 예비비 지출 과정에서 '긴급성'과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법적 요건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구가 올해 6월 구의회에 제출한 결산 자료와 당시 예산결산특별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구는 지난해 홍보용 영상 제작과 각종 행사 운영비 명목으로 수억원의 예비비를 지출했다. 

홍보 영상 제작은 매년 반복되는 정례적인 행정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예비비로 처리한 것은 지방재정법 제43조 위반 소지가 있다는 것이 구의회의 공식적인 지적 사항이었다.

서초구 역시 2024회계연도 결산에서 예비비 운용의 적절성 논란에 휩싸였다. 구는 청사 내 사무용 가구 교체와 업무용 비품 구입 등 일반 운영비 성격의 지출을 예비비로 충당했다. 사무기기 교체는 연간 집행 계획에 따라 본예산이나 추경 예산으로 처리해야 할 전형적인 '예측 가능' 항목이다. 그럼에도 구가 의회의 사전 심의를 생략할 수 있는 예비비를 선택한 것은 행정 편의주의를 넘어선 의회 무시 처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 마포·용산, 의회 삭감 예산을 예비비로 '부활'
더욱 심각한 대목은 구의회에서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삭감한 예산을 예비비로 돌려 막는 '보복성 지출' 의혹이다. 마포구의 경우, 2024년도 예산 심사 과정에서 타당성 부족으로 삭감된 특정 축제 지원금과 홍보성 사업비 일부를 예비비로 집행하려다 구의회와 정면충돌했다. 이는 헌법과 법률이 부여한 의회의 예산 심의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용산구 또한 2024회계연도 결산 검사 결과, 대규모 행사 운영 과정에서 발생한 추가 인건비와 소모품 구입비를 예비비에서 지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행사의 규모와 투입 인원은 기획 단계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영역임에도 일단 예산을 적게 편성해 의회 승인을 받은 뒤 모자란 돈을 예비비에서 꺼내 쓰는 '예산 쪼개기' 관행이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자치구 재정 통계의 투명성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료=각 자치구

■ 사후 승인의 맹점… '의회 패싱'을 방치하는 제도적 결함
현행법상 예비비는 지출 후 다음 해 구의회의 사후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미 집행된 돈을 의회가 승인 거부하더라도 실질적인 환수나 인사상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제도의 허점이 악순환을 부추기고 있다. 서울시 자치구의회 관계자는 "결산 심사 때마다 '왜 이런 곳에 비상금을 썼느냐'고 질타하지만, 이미 써버린 돈이라 '부적정' 의견을 내는 것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특히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전체 예비비 지출 중 재난 대응을 위한 '재난 관리 예비비' 집행률은 극히 저조한 반면, 용처가 모호한 '일반 예비비' 지출 비중이 60%를 상회한다는 점은 매우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자치구가 예비비를 본래의 재난 대비 목적이 아닌, 의회의 눈을 피해 사업을 강행하기 위한 '비자금 터널'로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지방 재정 감시의 권위자인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서울 자치구들의 실태를 강력히 비판했다. 이 위원은 "지방재정법상 예비비는 '예측 불가능성', '긴급성', '비경제성'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며 "홍보비나 비품 구입은 이 중 단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는 명백한 예산 원칙 파괴"라고 진단했다.

이어 "마포구나 용산구처럼 의회가 삭감한 예산을 예비비로 부활시키는 행위는 지방자치 제도의 근간인 견제와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라며 "사후 승인 단계에서 부적절한 지출에 대해 단체장에게 변상 책임을 묻거나, 다음 해 예산 편성 시 페널티를 부여하는 등 실질적인 징계 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텅 비어가는 서울 자치구 곳간, '비상금' 관리부터 바로잡아야
현재 서울시 자치구들은 국세 수입 감소와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해 유례없는 재정난을 겪고 있다. 예비비를 '쌈짓돈'처럼 낭비하는 관행은 결국 구민들의 복지 예산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자치구 예비비 지출 가이드라인을 위반할 경우 교부세 감액 등 강력한 재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 또한 각 구의회는 예비비 지출 내역을 매월 보고받고 부적절한 지출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시정 요구와 감사원 감사를 청구하는 등 적극적인 감시 행정에 나서야 한다.

예결신문은 3부에서 재정 위기 속에 지자체들이 기금을 편법으로 전용하는 '기금 돌려막기' 실태를 추적할 예정이다.

■ 출처
• 행안부 '지방재정 365' 2024~25회계연도 서울시 25개 자치구 예비비 편성 및 지출 현황 자료
• 서울시 25개 자치구의회 2025년도 제1차 정례회 예결특위 회의록 및 결산 승인안 심사 보고서
• 각 자치구의회 2025년도 행정사무감사 결과보고서 내 '예비비 지출 부적정' 지적 사항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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