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0조 공룡의 '기후 침묵'⸱⸱⸱국민연금, 중점관리 기업 선정 '0곳'

신세린 기자

| 2025-03-12 18:34:13

기후변화 '중점관리사안' 지정 2년 지났지만 실질적 주주권 행사 전무
포트폴리오 내 탄소 배출 국가 전체 4% 육박⸱⸱⸱한전·포스코 등 기후 리스크 방치 지적
해외 연기금은 수백개 기업과 투명하게 소통⸱⸱⸱'코리아 디스카운트' 가속화 우려
국민연금이 기후변화를 ‘중점관리사안’으로 지정했음에도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조차 선정하지 않는 등 기후 리스크 관리를 위한 실질적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진=예결신문)

[예결신문=신세린 기자] 국민연금이 기후변화를 '중점관리사안'으로 지정하며 기후 리스크 관리를 천명했으나 정작 실질적인 조치인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조차 선정하지 않는 등 '행동 없는 선언'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1200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는 세계 3대 연기금으로서 기업의 탄소 감축을 유도하고 기금의 장기 수익성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 제도만 있고 실행은 없다⸱⸱⸱기후 스튜어드십 '낙제점'
12일 기후솔루션이 발간한 '기업을 움직이는 국민연금: 기후 리스크 관리의 한계와 개선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2023년 3월 수탁자 책임 원칙을 개정해 기후변화를 중점관리사안으로 추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관련 주주 활동 실적이 전무했다.

국민연금의 수탁자 책임 활동 지침은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 선정'을 시작으로 '비공개 중점관리 기업', '공개 중점관리 기업', '주주제안'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절차를 규정한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기후변화와 관련해 이 절차를 밟은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는 같은 시기에 도입된 '산업안전' 항목에서 이미 4곳의 비공개 대화 대상 기업을 선정한 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 '금융 배출량' 국가 전체 4%⸱⸱⸱한전·포스코 등 리스크 노출 심각
국민연금의 소극적인 태도가 더욱 우려되는 이유는 포트폴리오 내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들이 기후 리스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어서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등의 분석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 중 배출량을 공시한 312곳의 '금융 배출량'은 우리나라 전체 배출량의 약 4%를 차지한다.

특히 한국전력공사, 포스코홀딩스, 현대제철 등은 국민연금이 주요 주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이자, 동시에 기후 리스크로 인한 가치 하락 위험이 가장 큰 기업들로 꼽힌다.

실제로 영국 LGIM은 한전의 석탄 사업 비중을 이유로 5년 연속 투자를 배제했으며 포스코홀딩스 역시 유럽의 30개 투자기관으로부터 투자 금지 명단에 올랐다. 국민연금이 이들 기업의 변화를 끌어내지 못할 경우, 글로벌 자금 이탈과 탄소 규제로 인한 수익률 하락은 고스란히 국민의 노후 자산 손실로 이어지게 된다.

■ 해외 연기금은 '압박'⸱⸱⸱국민연금은 '깜깜이 대화'
국민연금의 폐쇄적인 운영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노르웨이 정부 연기금(GPFG)이나 네덜란드 공적연기금(ABP)은 기후 대응이 미흡한 기업명과 대화 내용, 성과를 웹사이트에 실시간으로 공개하며 시장에 명확한 시그널을 준다.

반면 국민연금은 공개 중점관리 기업 지정 전까지 모든 과정을 비공개로 부치고 있어 수탁자로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검증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

해외 연기금이 우리 기업에 대해 더 선제적인 조치를 취하는 역설적인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네덜란드 ABP는 2022년 에너지 전환 계획 부재를 이유로 한전 채권을 매각하고 삼성전자, 현대제철 등 우리 기업 10곳에 탄소 감축 요구 서한을 보냈으나 정작 국내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은 비공개 면담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자료=기후솔루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기후 리스크'를 단순한 환경 이슈가 아닌 '수익성 이슈'로 인식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경제개혁연대 노종화 정책위원은 "국민연금의 기후 대응 활동이 일부 기업과의 비공개 면담이라는 소극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석탄 관련 기업 투자 배제 정책은 유예 기간이 길어 실효성이 낮고, 구체적인 관여 활동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 시장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는 기후 위험 및 탄소 배출량 공시와 함께 실질적인 주주권 행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후솔루션 황보은영 연구원 역시 "국민연금은 중점관리 기업의 범위를 대폭 확대하고, 한전과 포스코 등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을 우선 관리 대상으로 지정해야 한다"며 "기업과의 대화 목표를 명확히 설정하고, 개선이 없을 시 투자 철회 등 강력한 후속 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자산의 장기적 가치를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최후의 보루다. 기후위기가 자산 가치를 훼손하는 실질적인 금융 리스크로 부상한 지금, 국민연금의 침묵은 수탁자 책임의 방기나 다름없다"며 "이제는 투명하고 강력한 기후 스튜어드십을 증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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