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진단] ‘K-RE100’의 역설⸱⸱⸱녹색프리미엄, 수출 기업 '그린워싱' 덫 되나
신세린 기자
| 2025-02-17 13:29:13
이중 계상 및 추가성 부재로 CBAM·ESG 공시 리스크 노출⸱⸱⸱"PPA 중심 예산 지원 시급"
[예결신문=신세린 기자] 대한민국 수출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의 탄소 장벽을 넘기 위해 채택해 온 '녹색프리미엄' 제도가 국제 기준과의 불일치로 인해 오히려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독배'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재생에너지 사용을 인정받기 위해 오랫동안 의존해온 이 제도가 글로벌 온실가스 산정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향후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 논란은 물론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퇴출 위기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 글로벌 표준 'GHG 프로토콜'의 외면…품질 기준 8개 중 4개 '불합격'
17일 기후솔루션 이슈 브리프 '녹색프리미엄은 GHG 프로토콜 기준에 부합할까'에 따르면 한국형 RE100(K-RE100)의 핵심 수단인 녹색프리미엄은 국제적인 온실가스 배출량 측정 표준인 '온실가스 프로토콜(GHG Protocol)'의 품질 기준을 대부분 충족하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온실가스 프로토콜은 기업의 탄소 감축 실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세계 공통의 가이드라인이다. 연구팀이 프로토콜의 '스코프(Scope) 2' 지침이 요구하는 8가지 엄격한 품질 기준을 바탕으로 녹색프리미엄을 분석한 결과, 4개 항목에서 불합격(X), 2개 항목에서 미흡(△) 판정을 받았으며 단 1개 항목만이 기준을 충족(O)하는 데 그쳤다.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정보의 불투명성'과 '이중 계상' 리스크다. 녹색프리미엄을 통해 발급되는 사용확인서에는 실제 전력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배출량 정보가 누락됐으며 한국전력이 공급하는 전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재생에너지원(태양광, 풍력 등)에서 유래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명확하지 않다. 이는 투명한 데이터 공개를 요구하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기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 조달량 98%의 쏠림 현상…'쉬운 길'이 불러온 정책적 사각지대
2021년 도입된 K-RE100 제도하에서 기업들은 녹색프리미엄,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구매, 전력구매계약(PPA), 자가발전 등 다양한 수단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색프리미엄에 대한 기형적인 의존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기준 K-RE100 총 조달량 8.95TWh 중 녹색프리미엄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98%(8.79TWh)에 달한다.
기업들이 녹색프리미엄에 쏠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추가적인 설비 투자나 복잡한 계약 절차 없이 기존 전기요금에 추가 비용(프리미엄)만 얹어 지불하면 즉시 재생에너지 사용 실적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의성은 독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녹색프리미엄 물량은 국가 전체의 재생에너지 발전량 예상치를 근거로 산정되는데 이미 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화(RPS) 제도에 따라 REC로 발행된 물량과 중복될 수 있다는 '이중 계상'의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실질적으로 재생에너지 발전량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 '추가성(Additionality)'이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 2026년 공시 의무화…글로벌 공급망 생존의 기로
내년부터 주요국들이 온실가스 배출량 공시를 의무화하고 회계 보고 기준을 강화함에 따라 녹색프리미엄에만 의존해온 우리 기업들은 수출 비상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당장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 적용될 경우, 국제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녹색프리미엄을 통한 감축 실적은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경우 우리 기업들은 막대한 추가 탄소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이는 곧 제품 단가 상승으로 이어져 시장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주도하는 공급망 탈탄소 요구다. 애플, 구글, BMW 등 글로벌 선도 기업들은 협력업체에 엄격한 스코프 2 배출 감축을 요구하고 있으며, 인정받지 못하는 재생에너지 수단을 활용하는 기업을 공급망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단순히 국내법상의 요건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글로벌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 정책 개편과 재생에너지 인프라 예산 전략적 배분
전문가들은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의 녹색프리미엄 중심 조달 체계를 벗어나 실질적인 탄소 감축 효과와 추가성이 입증된 직접 전력구매계약(PPA)이나 REC 구매로 기업들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PPA를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높은 망 이용료와 복잡한 계약 구조에 따른 비용 부담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기업들이 녹색프리미엄이라는 임시방편에 의존하지 않도록, PPA 전력거래망 이용료를 보조하거나 재생에너지 인프라 확충에 예산을 집중 투입해야 한다.
또한, K-RE100 지침을 국제 기준인 온실가스 프로토콜 수준으로 고도화하여 국내 기업들이 의도치 않게 ‘그린워싱’ 논란에 휘말리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
기후솔루션 에너지시장정책팀의 브룩 사보이 연구원은 이슈 브리프를 통해 국내 기업들의 조달 전략 수정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는 "현행 녹색프리미엄은 국제적으로 요구되는 책임성, 투명성, 그리고 온실가스 추가 감축 기여 측면에서 명백히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사보이 연구원은 특히 "이와 같은 방식으로 RE100을 이행할 경우, 기후 목표 달성에 기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ESG 평가에서도 신뢰도 하락과 녹색 금융 조달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며 "올해 녹색프리미엄 입찰을 앞둔 기업들은 자사의 재생에너지 조달 포트폴리오를 재점검하고 PPA 등 직접적인 감축 수단 비중을 과감히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2026년 글로벌 공시 의무화라는 파고를 넘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구책과 정부의 전략적 산업 예산 배치가 시너지를 내야 한다. '무늬만 재생에너지'인 제도를 방치하는 것은 우리 기업들을 글로벌 시장에서 무방비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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