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AMPC 착시 걷어내니 2조 적자"⸱⸱⸱배터리 업계, '성장통' 넘어 '생존 게임' 돌입

신세린 기자

beluga23@naver.com | 2025-02-14 01:39:49

지난 몇 년간 한국 경제의 차세대 성장 엔진으로 주목받던 'K-배터리'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전기차 수요 둔화(Chasm·캐즘)의 골이 예상보다 깊어지면서 지난해 국내 주요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와 소재 기업들이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면서다. (일러스트=AI)

[예결신문=신세린 기자] 지난 몇 년간 한국 경제의 차세대 성장 엔진으로 주목받던 'K-배터리'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전기차 수요 둔화(Chasm·캐즘)의 골이 예상보다 깊어지면서 지난해 국내 주요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와 소재 기업들이 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면서다.

단순한 업황 사이클의 하락을 넘어 미국 발(發) 정책 리스크와 중국의 저가 공세가 겹치며 산업의 구조적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확장' 일변도였던 배터리 업계의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진 시점이다.

■ 껍데기만 남은 실적⸱⸱⸱AMPC 제외하면 '2조원대 적자'
14일 국내 배터리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배터리 3사의 합산 매출액은 48조5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30.1% 급감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수익성이다. 합산 영업이익은 -1883억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하지만 이 수치조차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혜택이 반영된 '착시 효과'가 포함된 결과다. LG에너지솔루션이 얼티엄셀즈 2공장 가동으로 1조4800억원의 AMPC 혜택을 받으며 그나마 버텼지만, 신규 공장 가동이 없었던 SK온은 혜택이 반토막 났다.

문제는 본업의 경쟁력이다. AMPC라는 보조금 효과를 걷어내고 나면 배터리 3사의 실질적인 합산 영업손실은 무려 2조원에 육박한다. 매출은 줄어드는데 공장 가동률은 60% 수준으로 추락했고 그동안 공격적으로 늘려놓은 설비투자(CAPEX)가 부메랑이 되어 막대한 고정비 부담으로 돌아온 탓이다. 제조업에서 가동률 60%는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힘든 '죽음의 계곡'으로 통한다.

■ "배터리가 멈추니 소재도 멈췄다"⸱⸱⸱밸류체인 연쇄 타격
전방 산업인 배터리 제조사의 위기는 후방 산업인 소재 업체들에게 쓰나미로 밀려왔다. 에코프로비엠, 포스코퓨처엠 등 주요 소재 4사의 매출은 전년 대비 41.3%나 증발, 271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이는 전형적인 '채찍 효과(Bullwhip Effect)'다. 전기차 소비가 조금만 줄어도 완성차 업체는 주문을 더 줄이고 배터리 업체는 소재 구매를 멈춘다. 지난해 하반기 배터리 셀 업체들이 강도 높은 재고 조정에 들어가면서 소재 업체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특히 뼈아픈 것은 '재고 자산 평가 손실'이다. 광물 가격이 높을 때 비싸게 사들인 원재료가 제품으로 팔리지 못하고 창고에 쌓여있는 동안 리튬·니켈 등 광물 가격이 하락하며 자산 가치가 폭락했다. 팔지도 못했는데 장부상 손실만 눈덩이처럼 불어난 셈이다.

■ 트럼프 2.0 시대의 '퍼펙트 스톰'⸱⸱⸱보조금 축소와 관세 장벽
올해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는 것은 대외 변수다. '자국 우선주의'를 기치로 내건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은 K-배터리에 양날의 검이 아닌 '이중 악재'가 될 공산이 크다.

우선 전기차 보조금 축소는 소비자들의 실질 구매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수요 회복을 지연시킬 것이다. 전기차가 안 팔리면 충전 인프라 투자가 위축되고, 이는 다시 전기차 매력도를 떨어뜨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여기에 '보편적 관세'까지 현실화될 경우 원재료 조달 비용이 상승한다. 국내 업체들은 중국산 전구체 의존도가 여전히 높은데, 미국의 대중국 제재와 관세 장벽이 높아지면 원가 경쟁력에서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매출은 안 오르는데 비용만 늘어나는 구조적 딜레마에 빠질 위험이 크다.

자료=예결신문

■ 전략 대수정⸱⸱⸱"덩치 키우기 멈추고 내실 다진다"
생존의 기로에 선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올해 경영 화두를 '성장'에서 '생존'과 '내실'로 급선회했다. 무조건적인 생산 능력(CAPA) 확장은 이제 옛말이다.

기업들은 신규 공장 가동 시점을 늦추며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놀고 있는 유휴 설비(라인)는 최근 AI 데이터센터 붐으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에너지저장장치(ESS)용이나 보급형 전기차 시장을 겨냥한 LFP(리튬인산철) 배터리 생산 라인으로 전환하고 있다. 고정비를 어떻게든 줄여보려는 고육지책이자, 포트폴리오 다변화 전략이다.

결국 올해 배터리 업계의 성패는 '누가 더 잘 버티느냐'에 달렸다. 당분간 드라마틱한 수요 회복이나 판가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영업 활동을 통한 현금 창출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항구 전북자동차융합기술원장은 "지금의 실적 쇼크는 단순히 업황의 문제가 아니라 '고성능 삼원계(NCM) 배터리'와 '전기차(EV)'에만 과도하게 집중했던 한국 배터리 산업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며 "캐즘 시기를 버티기 위해서는 전기차보다 수익 구조가 안정적인 ESS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중국이 장악한 LFP 배터리 시장에도 진출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등 포트폴리오 다변화가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되었다"고 말했다.

또 "기업들은 비주력 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확보하고 외부 자금 조달을 통해 재무 건전성을 방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며 "지금의 위기는 단순한 불황이 아니라, 전기차 산업이 대중화 단계로 넘어가기 직전 겪는 혹독한 성장통이다. 이 기간 기술적 초격차를 유지하면서 재무적 체력을 보존한 기업만이 다음 호황기에 시장의 패권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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